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이 다카코 (문단 편집) == 일생 == 1928년 11월 30일 [[고베시]]에서 [[의사]]의 딸로 태어났다. 1945년까지 [[교토부]]에서 살았다가, [[일본 본토 공습]]을 피해 고베 외곽으로 피신했다. [[교토여자전문학교]](現 [[교토여자대학]]) 중국어과를 1949년 졸업, [[도시샤대학]] 법학부 3년에 편입해 1951년 졸업한 후, 1956년엔 [[도시샤대학]]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도이는 1949년 교토여자대학 강사를 시작으로 1958년부터 1970년까진 도시샤대학, 1963년부터 1969년까지 [[간사이가쿠인대학]], 1967년부터 1969년까지는 세이와여자대학 강사로 일했다.[* 당시에는 여성이 대학은 커녕 학교를 졸업하는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미군]]의 공습으로 유복했던 집안의 재산이 잿더미가 될번한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자연스레 진보쪽으로 성향이 기울었고, 대학생 시절 헌법학자 타바타 시노부의 반전 연설에 감동받아 호헌파가 되었다고 한다. 도시샤대학에서도 타바타 시노부의 지도를 받았고 헌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던중 [[일본사회당(1945년)|일본사회당]]의 공천을 받아 정계에 입문하고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효고현 제2구]]에 출마, 당선된다. 1980년 정부를 상대로 남녀고용차별과 부계밖에 인정하지 않는 국적법을 맹공하여 유명세를 탔고, 3년만에 다나카 스미코의 후임으로 당내 제2인자 자리인 부위원장에 취임했다. 1986년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해 이시바시 마사시 위원장이 사퇴하자 여성으로는 일본사회당 역사상 최초로 위원장직에 취임했다. 도이 다카코의 명료한 말투, 좌우대립 정리 및 민사당과의 협력, 국민정당으로의 전환 등이 합쳐졌다. 또한 1987년 지방선거에서 '''도이붐'''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당의 지지율이 폭등했다. 그 결과 자연스레 도이는 향후 일본을 이끌어나갈 차기 총리감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경제 정책을 맹공하였으며, 이후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리직에 오르자 [[리크루트 사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다케시타를 내각총리대신직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동시에 이와테 재보선에서 승리했고 사회당 주도의 정권 교체 확률을 높였다. 1989년 15회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1945년)|사]][[공명당|공]][[민사당|민]] 3당 연합체'''이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단일 후보를 냈고 사회당은 개선 의석의 두배 이상을 얻으며 55년 체제 이후로 최초로 자민당을 누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마돈나 선풍'''이라고 불렸다. '산이 움직였다.'는 말도 이 때 나온 말이다. 그래서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될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후보자를 많이 늘리지 못하여 149명 정도 내는데 그쳤다. 사회당이 136석을 차지하여 1967년 총선 이래 최대의석수를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민당이 275석을 확보하여 여전히 정권을 유지한데다가 공명당은 부진하고 민사당은 참패하여 사회당 내부에서의 돌풍에만 그치고 다른 야당에 수혜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비판론이 제기되었고,[* 단, 이건 어쩔수 없던 문제였던것이 연합정당인 공명당과 민사당도 같이 리크루트 사건에 휘말려서 조직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또한 [[가이후 도시키]]가 어느정도 이미지를 만회한 상태였고, 또한 사회당이 후보자를 많이 늘리지 않았다는것도 감안해야된다.] 평화주의 등 사회당의 정책이 구시대적이며 경제위기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도이 무용론'도 제기되었다. 정권교체의 기대감이 적어진 상태에서 치러진 1991년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면서 결국 도이 다카코는 당수직을 사임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사회당은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 PKO법 갈등으로 조직이 갈라지면서 참패했고 1993년 총선에서는 신당열풍으로 상당수의 표가 타 야당으로 넘어가면서 참패했다. 다만 정권 교체 성공에 대한 일종의 보은으로 [[일본신당]], [[신생당]] 등의 도움을 받아 도이 다카코는 역사상 최초로 여성 + 진보계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1994년 자민당과 연합해 사회당이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무라야마 내각의 지지율이 부진한데다가 당내 지지기반도 신진당이나 공산당으로 휩쓸려나가며 사회당의 의석수는 급속히 줄어들어 상당수의 당원과 의원들이 [[민주당(일본 1996년)|민주당]]으로 탈당했고 민주당에서 구세대 정치인 이미지였던 도이와 무라야마의 입당요청을 거부하는 수를 썼기에 잔류했다. 1996년 중의원선거에서 사민당은 15석으로 참패했다. 도이 다카코는 [[무라야마 도미이치]]에 이어 사회민주당의 제2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96년 실시한 제41회 중의원 선거에서 사민당의 의석은 15석으로 쪼그라들었지만 오히려 도이 다카코 중심 체제가 성립되어 독단적인 당 운영을 한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신사회당]]의 [[오카자키 히로미]]는 아예 <창문 없는 당 운영 도이 다카코와의 결별>(...)이라는 저격 책을 쓰기도 했다. 1998년 사민당은 연립여당에서 이탈했고 졸지에 도이 다카코만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만다. 2000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부의장이 되기도 했고 2000년 총선에서 20석을 건졌지만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에게 표가 휩쓸린 영향으로 자민당 의원에게 처음으로 패하며 당수직에서 물러난다. 당수는 [[후쿠시마 미즈호]]가 이어받았다.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는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고 긴키블록 비례 5순위로 출마했으나 낙선하면서 정계를 완전히 은퇴했고, 2014년 노환으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